이체리 스토리 [11]

지금 시각은 오후 5시를 향해 가고 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을까. 방금 전 아침을 먹고 세면대에서 머리카락을 헤아리며 오늘 어떤 일부터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연재 스토리를 쓰기 위해 가까운 박물관에라도 방문해야 할까, 아니면, 골프 클럽 챙겨서 연습장으로 향해야 할까, 아니면, 책상 위에 겹겹이 허물 벗어 놓은 듯 쌓여 있는 책들을 정리해야할까. 일단은 10여일 가까이 마트에 다녀오지 않아서 텅텅 비어있는 냉장고를 채워 넣어야한다. 꼭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처리하고 싶지 않은 법이다. 하루 이틀 쇼핑을 미루어 오다가 정말 오늘부터는 손가락 빨고 있게 생겼다.
 
가까운 서점 바로드림에도 들러야 한다. 벌써 책을 준비해 놓았다는 메시지를 받은 것이 여러 날 전이다. 다행히 서점과 백화점이 한 건물에 있으니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출 준비 단계부터 복잡하다. 따가운 햇살을 막을 수 있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페이스 파우더로 마무리한다. 평소 바르지 않던 립스틱을 꺼내어 입술에 도포한다. 편한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모자를 쓴다. 외출 준비의 마무리는 향수 뿌리기. 비로소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들고 나갈 가방까지 쉽게 선택하여 어깨에 걸었으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나선다. 차를 타고 동네 입구에 있는 세탁소부터 방문한다. 맡길 세탁물을 내려놓고, 찾아와야 할 옷을 확인한다. 캐주얼 상의 셔츠 하나에 일 백 만원이 넘는 명품 브랜드 아닌가. 물론 내 옷은 아니지만 정성스럽게 체크한다.

드디어, 서점과 백화점이 한 건물에 있는 목적지에 도착한다. 주차장이 비어 있는 시간대를 기다리다 보니 월요일이다. 우아한 발걸음으로 서점에 도착해서 주변 서가를 둘러보니 인문 서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 쇼핑에 뜸을 들이지 않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세 권의 도서를 1분 만에 선택해서 계산대로 향한다. 구조주의에 대한 것, 미적 감상을 내용으로 하는 것, 마지막으로,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매력들 가운데 하나에 대한 것 등등을 선택했다. 제목만으로 책을 구입했으니 내용의 스타일은 전혀 모르는 상태이다. 세 권의 책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바로드림에 예약해 놓은 네 번째 책을 집어 든다. 사마천의 작품이다. 워낙 유명한 고전이어서 따로 설명이 필요할까.

비어 있는 냉장고를 채우기 위한 외출이 아니었던가. 우선 백화점에서 구입해야 할 품목 리스트를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여름의 전령사 열무, 브런치의 대명사 핫케익 가루, 바다의 우유 미역을 빠르게 선택한다. 또 다른 마트로 이동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아니, 난 이미 서점 문을 나선 이후, 백화점 행사장에서 초여름 빛이 물씬 풍기는 화려한 색감의 스커트와 반짝거리는 은사 직물의 상의, 그리고 연한 민트 빛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4분 안에 선택해서 쇼핑백 안에 넣어 놓은 상태이다. 양 손에는 서점에서 들고 온 쇼핑 백, 행사장에서 들고 나온 쇼핑 백, 식품관에서 구입한 열무, 미역, 기타 등등을 담은 쇼핑백으로 샌들을 신은 발 등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다음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한다. 자동차로 약 8분 거리. 작은 마트 안에 세상에 있어야 할 것은 다 있고, 없어야 할 물건들은 없는 미니 쇼핑 공간이다. 김밥 재료, 각종 야채, 불고기 재료, 새송이 버섯, 음료수, 수박(엄청 무겁다), 참외, 등등을 잔뜩 차에 실었다. 이제는 '쇼핑을 마쳤겠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집 근처에 도착해서 이름 난 베이커리에 들러, 공주 밤 식빵, 구리볼, 슈가사무에, 치아바타, 영주단팥빵을 봉지 가득 담아서 차에 오른다. 머릿속은 혼란스럽다. 집에 도착해서 그로테스크한 책 표지를 열어보니 대학 동문이 번역한 책이란다. 나는 뒤죽박죽 별장에 다녀 온 사람처럼 한동안 멍했다. 

글 : 이 체리(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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