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추 전 신약조합 회장 '이강추 85년 회상기' 출간

국내 신약개발 수준이 기술수출 단계까지 진전된데에는 곳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인물들의 기여를 빼 놓을 수 없을텐데, 이강추 전 신약개발연구조합 회장도 그 가운데 한명이다.

이 전 회장은 최근 주어진 다양한 역할에서 성실하게 살려했던 삶의 편린들을 모아 '약과 함께, 신앙과 함께, 시대와 함께 이강추 85년 회상기'를 약업신문에서 출간했다. '얻으니 잃고, 잃으니 얻더라'가 회상기 타이틀.

1989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약정국장이던 그는 물질특허제도 도입을 계기로 신약개발과 인연을 맺게된다. 약정국장으로 그가 관장하던 제약산업계는 1987년 물질특허제도 도입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업계에선 "한국 토종 제약산업은 모두 죽게됐다"는 탄식들이 해를 지나도 가라앉지 않고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게 오리지널 의약품을 제조방법을 달리해 내놓았던 개발 방식이 원천 차단됐는데, 신물질 신약을 낼 역량은 전무하다시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에 따라 고사되든가, 도전하든가 길은 두 갈래였다.

정부 대책은 절실했다. 그는 1989년 7월 약무행정사상 처음으로 '신약개발 정책에 관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산학연관 전문가 100여명이 달려들어 ▷신약개발 ▷제도지원 ▷전문인력 ▷의약정보 4개분야에 걸쳐 사흘간 주제 발표와 열띤 토론을 벌여 국내 기업들의 선진화-국제화를 위한 신약개발 정책을 재조명하고, 신약개발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정책 도출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만들었다.

1999년 대한민국 신약 1호 상량식 후 당시 임성기 한국제약협회장(왼쪽 세번째), 허근 식약청장(네번째), 이강추 전 회장(오른 맨끝)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1999년 대한민국 신약 1호 상량식 후 당시 임성기 한국제약협회장(왼쪽 세번째), 허근 식약청장(네번째), 이강추 전 회장(오른 맨끝)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심포지엄을 토대로 보사부는 1990년 '신약개발 기본 계획' 발표하며 신약개발에 관한 정부의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관건은 언제나 돈이었다. 보사부는 1991년 신약개발 연구지원 예산 10억원을 편성해 달라고 예산당국에 요청했으나 신규사업이라며 실무선에서 전액 삭감됐다. 당시 김정수 장관이 나서 5억원을 살려냈다. 복지부의 신약개발 지원 예산의 출발점이자 규제 기관에서 일부 투자기관으로 변모되는 전환점이었다.

자리를 옮겨 국립보건원장으로 있던 그는 1995년 말 정년 퇴임을 맞았다. 그렇게 신약개발과 인연은 끝인 줄 알았다. 그는 퇴임 소식이 전문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며칠 뒤 "H약품 L회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니셜로 표현했지만 한미약품 임성기 회장이었다.

그는 "임성기 회장을 만났는데 '(내가)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는 데, 오셔서 국내 제약산업의 신약개발 기반 마련과 성장에 힘을 쏟아달라'고 제안했는데, 당시 사정상 두고보자고 하고 헤어졌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임 회장은 다시 일주일 뒤에 전화를 걸어 만남을 요청했다고 한다. 자리에 나갔더니 임 회장은 녹십자 허영섭 회장(작고)과 함께 나와 '우리나라 제약산업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이 단체가 커져야 하니 신약개발 분야의 성장을 위해 꼭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이 전 회장은 떠올렸다.

1996년 3월 신약개발연구조합 상근 부회장에 취임한 그는 20년 동안 일하면서 여재천 전무, 조헌제 상무와 함께 '정부와 국회 등을 찾아 신약개발의 중요성과 정부 지원의 필요성을 설파해 왔다. 이런 그에게 정부는 2003년 4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그는 회상기에서 신약개발과 관련해 '기술자가 대우받는 사회'를 꿈꿨다. 2008년 2월 제9회 대한민국 신약개발상 시상식 리셉션 현장에서 당시 김인철 LG생명과학 사장의 '기술자가 대우받는 사회를 위하여'라는 건배사를 감격스러운 장면으로 돌아봤다. "어린 시절 허약체질에 소심공포증이 있었다"고 회고한 그는 있던 곳에서 성실했고, 맺어진 인연을 따라 국내 신약개발사에 '벽돌 한장'을 올려놓는 인물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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