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길, 모험 떠나는 젊은 후배들 응원"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쇼의 묘비에 새겨진 '내 인생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인생은 한 번 주어진 기회인데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른 채 스스로 표류하면서 흘러간 시간이 아쉽다."

맹호영(59, 서울약대 81) 보건복지부 부이사관은 32년 공직을 마친 소회를 이렇게 풀어냈다. 그러면서 "잘못과 후회만 밀려온다.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치열하게 보내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 했다. 또 "행복은 아이스크림과 같아서 그 때 즐기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데 그걸 망각한 게 또한 아쉽다"고 했다.

맹 부이사관의 이런 심경은 공직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20대 '청년 맹호영'은 약대를 마치고 부광약품 반월공장 품질관리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그 시절을 '평온한 일상'으로 기억했다. 그러다가 1987년 어느 날 '임시직 참사'라는 처음듣는 통로로 공직에 들어섰다.

"개인 머슴보다 나랏 머슴이 낫지.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거든." '청년 맹호영'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건 한 선배가 무심코 뱉은 이 말이었고, '청년 맹호영'이 '중년 맹호영'이 되는 32년의 세월을 함께 한 말이기도 했다.

국내 제약산업의 변화와 발전은 '나랏 머슴'에게 남은 보람의 가장 큰 축이었다. 맹 부이사관은 "2006년 한미FTA 협상으로 제약산업 규제 제도를 속도감 있게 글로벌 스탠다드 수준으로 끌어올린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한미FTA 협상타결로 어려워진 국내 제약업계 지원을 위해 처음으로 범정부차원의 종합대책도 마련했고, 제약산업에 정부의 재정지원이 폭넓게 이루져 결과적으로 국내시장에 머물러 있던 제약산업이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려 지금은 국제경쟁력을 지니고 전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맹 부이사관은 한미FTA 협상 당시 의약품 분야에서 '창과 방패'로 역할했다. 그는 당시에도 "국내 제약산업도 이제는 온실에서 벗어나 세계시장으로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 한미 FTA 피해산업으로 규정돼 있지만 지금이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라고 했다.

한미 FTA 협상이후 보건산업기술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맹 부이사관은 당시 지경부 강명수 바이오헬스과장, 교과부 최원호 미래원천기술과장과 의기투합해 이른바 '전주기 신약개발 사업'을 만들어 제약산업 R&D 지원에 큰 물꼬를 텄다.

보험약제과장 시절엔 환자 신약 접근성과 보험재정 건정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위험분담제(RSA)를 도입했다. 또 대형병원에 이익을 몰아주는 기형적인 제도로 전락한 시장형실거래가제도를 폐지하고, 처방조제약품비절감제도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맹 부이사관이 처음부터 약사의 삶을 꿈 꾼 건 아니었다. 대학도 이공계 진학이 먼저였다. 하지만 얼마 안돼 진로를 바꿨다. 나이보다 조금 늦은 1981년 서울대약대에 입학한 이유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제1호 약업사였던 외할아버지를 보면서 약이 좋아서 약사가 됐고, 약무정책이 적성에 맞아 공직약사로 32년을 살아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약사, 그것도 공직약사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오랜기간 '맏형' 역할을 톡톡해 해왔다.

그리고 32년 공직을 떠나면서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처음에는 새로운 길(남이 잘 가지 않는 길)이 두렵고 불안하지만 막상 가보면 즐거움과 호기심이 가득해진다. 사람 사는 세상은 'Up and Down'이 있기 마련이다. 항상 좋고 항상 나쁜 건 없다. 언제나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스스로 격려하고 응원해 주길 조언한다. 새로운 길, 모험을 떠나는 젊은 후배들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맹호영 부이사관은 보건산업기술과장, 정신건강정책과장, 기초의료보장과장, 보험약제과장, 통상협력담당관 등을 지냈다. 이달 16일자로 보건복지부를 퇴직했고, 앞으로는 사회보장정보원에서 기획이사로 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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