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체리 스토리 [3]

무료한 주말 오후였다. 사흘 앞으로 다가온 페루 여행. 콘도르를 볼 수 있을까. 여행 가방을 쌌다. 정리는 끝이 없다. 포기하고 소파에 누워있었다. 될 대로 되라. 내가 여행 가방을 정리하지 않으면 '엔 플라잉(N Flying)'이 와서 대신 짐을 넣어 주겠지.

"이제는 내 방식대로 말할게 / 넌 너무 예뻐 오밀조밀한 게.... / 내 눈앞에 네가 나타났어. / 딱 기다려 왔던 순간 Oh yeah / 진짜가 나타났다” 록 사운드의 익숙한 리듬과 함께 정말 ‘진짜가 나타났다’ 처음 듣는 순간 난 꼭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도무지 진짜가 나타나지 않았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진짜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마카롱을 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도 나는 형형색색의 마카롱 크림을 혀끝에 묻혀 살살 녹여 먹었다. 마카롱 크림 요리법에 따르면 진짜 크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싱싱한 과일들을 졸여서 마멀레이드를 만들어서 마카롱 껍질 두 개 가운데 한쪽에만 바르고 나머지 한 쪽을 붙이면 완성이다. 과일들의 종류만큼이나 마카롱 크림의 색과 향은 무궁무진하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인가?

과일로만 마카롱 크림을 만드는가. 전혀 아니다. 각종 크림치즈, 버터, 머랭,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종류가 많은 차를 우려서 만든 향내들까지. 장밋빛 마카롱에 어떤 향과 색을 입히는가에 따라서 이름을 다르게 붙인다. 예를 들면, 베르가못 로제, 아로니아 로제, 쿠오레 로제, Number 6 로제, 기타 등등. 도무지 어떤 장밋빛 마카롱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천사 ‘엔 플라잉’은 진짜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고, 바윗돌을 부싯돌처럼 사용하며, 천지가 다 들을 수 있도록 진짜를 경험한 황홀경을 노래하고 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 순간의 번갯불을.

진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진짜는 진짜가 아니었던 과거와 연관이 있다. 얼마나 무료한 가짜들이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던가. 진짜가 나타난다 해도 과거의 기억들이 하도 오래되고 무료했던 탓에 진짜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태초부터 진짜란 없던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 기억들의 형상(eidos)이다. 이제 와서 진짜가 나타난다면 과거의 인내와 노력들은 무위로 돌아간다는 오해 때문이다. 진짜가 나타나서 과거의 기억들을 진짜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면 지금까지의 오랜 인내는 배척당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진다. 그 오랜 무료함이 진짜 대신 진짜 노릇을 계속해서 보존하는 한에 있어서만 지금까지의 무위를 보상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과거의 인내와 노력을 진짜가 나타난 시점에까지 끌고 들어 올 마음이 없다. 그 시절의 인내와 노력은 그 나름대로 아름답다. 바로 지금, 진짜가 나타난 시점에 타오르는 불길을 잡기 위해 진짜의 진짜다움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과거의 기록을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중요한 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 자욱했던 안개를 기억하는 일이 오늘의 아침 햇살을 감상하는데 장애 요인으로 맨 앞에 나타날 수 없는 것과 같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어제의 안개는 어제 가장 아름다웠고, 오늘의 아침 햇살은 지금 가장 진짜로 실재하는 것이다. 너는 그렇게 할 일이 없는지 묻고 있는 그대에게 말하고 있는 나는 어제의 그대와 다를 바 없는 과거의 실재였지만, 지금은 실존하고 있다고 표상하고 싶지 않다. 그대의 실재와 지금의 실존이 진짜를 대변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복잡한 요소들의 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눈 앞에 네가 나타났어. / 딱 기다려 왔던 순간 Oh yeah / 머리에서 종이 울려 딩동  댕동 / 진짜가 나타났다."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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