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잖은 기업 넘어 토털 헬스케어 구현할 대담한 비전 선포

일동제약 본사와 윤웅섭 일동제약 대표이사 사장

 

[인사이드 포커스] 77년 제약그룹 일동제약...포텐 터트릴 기반 마련 

임직원을 아끼고, 고객을 존중하며, 비즈니스 예절까지 밝아 '젊잖은 기업'이라는 평판을 받는 일동제약그룹(회장 이정치)이 창립 77주년에 역동성까지 장착하며 '포텐'을 본격적으로 터트릴 준비를 마쳤다.

'창업자(고 윤용구)→전문경영인→창업 2세(윤원영 일동홀딩스 회장)→전문경영인'의 싸이클 리더십에서 창업 3세 윤웅섭씨가 2016년 그룹 사업회사 일동제약의 단독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미래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윤 사장은 2013년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경영 전면에 나섰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불리는 윤웅섭 사장은 "의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 임직원들과 논의하며 경청하기를 즐기는 이른바 소통의 리더"로 알려져 있다. 반면 의제가 실행가능한 것인지, 결론 지은대로 실행되는지, 임직원 각자 역할에 맞게 자신의 일을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꼼꼼히 챙기며 양보하지 않는 캐릭터. 윤 사장은 할아버지(창업자)가 직원들에게 머리숙여 인사했던 것처럼 튀지 않는 리더로 유명하다. 해서 '일동엔 오너 리스크는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동제약그룹은 5월 3일 그룹 역사 77년만에 아주 대담한 비전을 선포했다. 제약그룹이 안정 성장을 하는데 필요한 최소 규모로써 '매출 1조원, 이익 1000억원의 토털헬스케어기업'을 제시했다.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건너고 허언을 싫어하는 기업문화 탓'에 구체적인 목표를 내보이지 않아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비전 선포는 매우 이례적이다. 역동성과 큰 포부가 감지된다.

토털헬스케어기업을 위한 토대는 마련했을까? 현재 제약그룹의 매출 비중으로 보면 전문의약품 6, 일반의약품 3, 비의약부문 1로 구성돼 있다. 무엇보다 내일을 가늠해보려면 연구개발(R&D) 역량일 터인데, 2017년 11월 출시한 B형간염치료제 신약 베시보(국내 28호 신약, 회사 첫 신약)를 계기로 R&D에 믿음이 넘쳐나고 있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 사업회사 일동제약의 2017년 매출은 4603억원이며, 연구개발 인원은 전체 1402명 가운데 204명(14.6%)이다. 100명 가운데 15명이 연구개발 종사자인 셈이다. 매출액 연구개발비는 2015년부터 11% 선을 유지하고 있다. 파이프라인 창고에는 표적항암제, 바이오베터, 천연물신약 과제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일동제약 파이프라인(자료 : 일동제약)
일동제약 파이프라인(자료 : 일동제약)

기업이 연구개발을 지속 하려면, 캐시카우가 될만한 전문의약품은 필수적이다. 현재 FDA 승인 도입 비만치료 신약 벨빅, 자체개발 세파계 항생제 후루마린과 위궤양치료제 큐란, 자체개발 최초 신약 B형간염 치료제 베시보를 주력 상품으로 갖고 있다.

미래 매출을 대비한 도입신약 계획도 잘 짜여져 있다. 대상포진치료제 팜비어를 비롯해 심혈관계 부작용이 현저히 줄어든 편두통치료제(라스미디탄), 혈액암치료제로 B세포 감소효과가 우수한 리툭시맙 바이오베터(유블리툭시맙), 주 1회 주사하는 인슐린 치료제가 순차적으로 도입돼 주력 품목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진행중인 신약 R&D는 임상 1상 결과를 바탕으로 라이센스 아웃을 계획하고 있는 표적항암제 IDX-1197이 있다. 작용기전은 암세포 DNA 복구효소인 PARP를 절단함으로써 암세포 복구를 억제해 암세포 사멸을 유도하는 기전의 신약후보물질로 작년 8월 국내 임상 1상에 들어갔다. 또다른 표적항암제는 IDF-11774. 이 역시 임상 1상 후 라이센스 아웃을 추진할 예정이며 내년 국내 임상 1상을 계획하고 있다.

바이오베터 2종 역시 준비돼 있다. 올해 임상 1상 계획이 잡힌 루센티스 개량 바이오신약 IDB0062와 아바스틴 개량 바이오신약 IDB0072는 내년 임상 1상을 준비하고 있다. 천연물 부문에서는 멀구슬나무의 열매인 쳔련자로부터 원료를 추출, 알츠하이머 개선 효능을 규명한 ID1201 과제는 올해 임상 2상을 완료할 예정이다. 신약 신청은 2021년에 할 예정이다.

OTC 부문은 탄탄한다. 종합비타민 아로나민(1963년 활성비타민 출시) 시리즈는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고함량 종합비타민 엑세라민 시리즈도 연매출 100억원을 넘어섰다.

1959년 국내 최초 유산균 영양제 비오비타 발매에 뿌리를 두고 있는  프로바이오틱스의 제품군 확대, 유통재널 다변화, 마케팅 강화를 통해 토털헬스키업의 큰 줄기로 성장중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6000여 균주에 이르는 방대한 프로바이오틱스 자산을 기반으로 피부주름개선, 콜레스테롤 개선, 치매예방물질 생성 프로바이오틱스를 개발하고 있다. 이미 아토피개선 프로바이오틱스는 이미 제품화했다.

일동제약그룹은 세계 30여개국에 완제 원료의약품을 수출이 가능한 생산시설은 물론 경영진의 R&D 투자에 관한 신념과 확신, 실질적인 투자,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주력 품목군의 안정적 도입 일정 마련, 아로나민을 앞세운 OTC, 생활음료 용품 등 그야말로 토털헬스케어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77년 일동제약 그룹을 변곡점 중심으로 살펴본다.

일동제약 초창기 사옥과 고 윤용구 창업자
일동제약 초창기 사옥과 고 윤용구 창업자

일동제약의 태동
 
일동제약은 1941년 3월 설립됐다. 설립자인 故윤용구 회장(1908-1993)은 충북 청원 출신으로, 서울약대의 전신인 경성약전 졸업 후 병원 실습, 제약소 직원 등의 일을 하다가, 직접 좋은 약을 만들어 민족의 건강을 지키고 싶다는 꿈을 갖고 일동제약을 설립했다.

일동제약 초기에는 건위고장환과 홍진산이라는 약품을 직접 만들어 판매했다. 건위고장환은 장질환을 위한 약이었고, 홍진산은 일종의 해열제로 폐렴에도 효과가 좋았다. 특히 홍진산은 시판된 지 한 달이 채 안되었는데도 평양에서까지 찾아와 주문할 정도로 효과가 좋았고, 그의 제약 실력은 물론 정직한 인품도 당시 업계에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제약과 판매도 모두 직접해야 했고 사무실도 안암동의 자택을 이용하는 등 제약회사라고 하기엔 아직 초라한 수준이었다. 회사의 경영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빚은 늘어갔고,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드는 당시 세계 정세는 회사 경영을 더욱 어렵게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윤보다는 보건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제약에 몰두한 일동제약은, 어느 정도의 골격을 갖추자 창신동에 새로운 사무실을 열고, 5개 제약사의 30여종의 품목을 5개 품목으로 정비했다. 그리고 이 약품들의 선전으로, 격동의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것이 일동제약의 시작이었다.

도약의 시작 : 비오비타와 아로나민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동제약은, 기존의 의약품만으로는 회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남들이 만들지 못한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해야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새로운 약의 개발, 원료약품의 국산화는 윤회장이 일찍이 제약회사를 세우는 계기이기도 했기에 오랜 구상을 실행으로 옮겨야 할 때라는 생각이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제품이 바로 유산균제다. 윤용구 회장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던 아픔을 바탕으로 유산균 연구를 시작했다. 어머니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건 장질환때문이었고, 윤용구 회장이 약사의 길을 걷게 되고 유산균제를 개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40년대 말부터 유산균제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고 여러가지 실험을 해왔던 일동제약은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제품화를 추진하게 된다.

유산균의 배양은 소자본으로 가능하나 기술과 시설의 뒷받침이 없어 당시 국내에서는 유산균 원료를 대량생산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배양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시설이나 환경이 열악하여 쉽게 사멸되곤 하였다.

일동제약은 윤용구 회장의 안암동 자택 뒤뜰에 실험실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3년에 걸친 실험 끝에 내구성과 내산성이 강한 종균의 포집과 배양에 성공하였고,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여기에 칼슘, 비타민B군 등을 혼합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비오비타였다. 1959년 8월의 일이었다. 비오비타는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된 대한민국 최초의 유산균제로 기록되어 있다.

 비오비타 발매 초기, 유산균제로서 경쟁품은 거의 없었으나 당시에는 이스트제제가 유아용 정장제로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인기 만화가 김용환 선생의 캐릭터를 이용하여 '코주부 어린이'를 등장시킨 광고를 내고 국산화에 성공한 원료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당시만해도 유산균이 대중들에겐 생소했기에 유산균의 효능과 효과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리어카를 구입해 임직원들이 직접 제품을 싣고 다니며 동대문 등지의 약국가를 누볐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비오비타의 매출은 서서히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일동제약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유명 제약사가 되었다.

일동제약은 비오비타의 개발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곧바로 또 다른 신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비타민제였다. 당시 유행하던 미국산 비타민제와 달리 흡수가 잘되고 동양인의 체질에 맞는 제제를 개발하고 싶었다. 비오비타를 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원료 자체를 우리 손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처음에는 마늘에서 비타민B1 원료를 추출하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제품화하기에는 추출할 수 있는 양이 너무 적어, 합성 연구로 방향을 돌렸다. 원료 합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늘 냄새에 대한 민원으로 실험실을 옮기기도 했고, 원료합성 성공 후에는 특허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제품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하여 1963년 늦여름, 드디어 일동제약의 간판 브랜드인 아로나민이 탄생하게 되었다.

시설투자도 지속했다. 의약품 창고를 새로 짓고 정제기, 자동포장기 등의 설비도 늘렸다. 총무부, 영업부, 생산부 등 업무단위 조직을 만들며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처음으로 공개채용도 실시했다.

대형제약사로, 업계 리더로 우뚝

아로나민은 제품의 품질과 효과 뿐만아니라, 마케팅 측면에서도 차별화된 전략으로 시장을 선도해갔다.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체력은 국력”이라는 카피와 함께한 스포츠마케팅,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캠페인 등, 새로운 시도의 마케팅을 통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대형 브랜드로 성장했다.

아로나민의 성공은 비오비타의 동반성장을 일구었고, 결정적으로 일동제약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발매 55주년을 맞은 현재까지도 일동제약의 대표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아로나민은 지난 2017년 매출 741억원을 기록하며 국내 일반의약품 1위 브랜드로 위상을 굳혔다.

일동제약은 아로나민의 성공에 이어 전문 치료제 생산에도 도전하게 된다. 1970년, 일동제약이 와이어스사와 제휴를 맺고 본격적인 치료제 생산에 나섰다. 그러한 제휴는 당시 다른 메이커들과는 다른 양상의 제휴였다.

일동제약은 완제품을 들여와 판매만 하는 편한 방식 보다는 기술을 공급받아 해당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 첫 작품이 ‘파란병의 하얀 위장약’으로 유명한 암포젤엠이다. 알루미늄으로부터 원료를 합성하는 기술과 합성된 원료를 겔형으로 제제하는 방법 등, 당시로써는 매우 까다로운 기술을 전수받아 우리의 힘으로 완제품을 완성시켰다.

일동이 기초원료의 합성에서 외화를 절약하고 생산원가를 최대한 줄여 외국제품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제품을 내놓았다는 점은 대외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았다. 일동제약은 1973년부터 암포젤엠을 비롯하여, 오부라0.25, 옥사인엠 등을 생산해내며 명실공히 치료제 전문 메이커로 한 걸음 더 올라섰다.

시설투자도 확대했다. 새로운 치료제 라인업에 맞추어 설계된 최신 설비의 도봉공장을 완공, 유산균 배양시설을 확장하고 무균 자동화시스템을 완비했다. 원료국산화를 가속화하기 위한 청주원료공장 착공을 준비한 것도 이 시기였다. 청주공장이 완공되면 광범위 최신 항생물질과 궤양치료제 원료들을 국산화함은 물론, 국내 제약사들이 당시 고질적으로 겪고 있던 원료난도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었다.

이렇게 성장을 거듭해 나가던 일동제약은 1973년, 10년전 아로나민이 막 발매되던 1963년과 비교하여 생산액이 60배나 성장했고, 직원수도 300명을 훌쩍 넘겼다.

기업공개와 고도성장

1975년 일동제약은 자본금 10억원으로 공개 기업이 되었다. 일동제약은 투명한 경영을 해왔다는 자신감으로 다른 회사들에 앞서 망설임 없이 기업공개를 진행했고, 신뢰받는 기업으로써 대중에게 한 층 더 깊이 각인되었다.

이 시기, 아로나민, 비오비타의 매출이 고공비행을 거듭했음은 물론, 새롭게 개발한 전문의약품들이 잇달아 성공했다. 일동제약은 어느 한 품목에 집중하기 보다는 다양한 품목으로 전략을 분산시켜 매출 성장과 리스크 최소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1976년에는 청주 원료공장을 완공하여 원료 국산화에 가속도를 냈으며 품질과 기술 수준이 현저히 높아져갔다. 영업에 있어서도 마케팅의 개념을 도입하여, 당장의 실적에 매달리기 보다는 장기적인 신뢰를 줄 수 있는 영업활동을 추진했다. 거래처의 단위별 판매 외형을 늘이기 보다는 제품이 소비된 후 수요가 생기는 단계에까지 완전 판매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이렇게 일동제약은 1970년대 말, 30%가 넘는 매출 성장을 거듭했고 1982년 대망의 2백억 매출 고지를 달성했다. 1961년 1000여만원의 매출을 올리던 회사가 20년만에 무려 2000배의 매출액을 올리는 대형제약사가 된 것이다.

1980년대 이후에도 일동제약의 순항은 계속됐다. 국내 제너릭의 효시격인 큐란이 대성공을 거두었고 1987년에는 당시 단일공장으로는 최대규모였던 안성공장을 준공하여 KGMP적격업체로 지정받았다. 1991년 일동제약은 창립 50주년을 맞으며 명실상부한 중견기업이 되었고, 야심차게 제2창업을 선언했다. 1992년 양재동으로 사옥을 신축 이전했다.

위기극복과 새로운 도전

90년대 말 일동제약은 IMF위기와 함께, 계열사였던 맥슨전자에 대한 지급보증의 문제로 워크아웃에 돌입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3년만에 조기졸업했다. 신규자금지원이나 채무출자전환과 같은 공적자금의 지원 없이 이루어낸 결과여서 워크아웃의 모범사례로 회자되기도 했다.

위기를 교훈으로 삼아, 2001년 창립 60주년을 맞아 새로운 기업이념을 선포하고 기업문화 혁신활동과 함께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선진화해 나갔다. 1996년 매출 1000억을 달성한 이후 IMF로 잠시 주춤했던 회사규모는 2005년 매출 2000억, 2008년 3000억, 2014년 4000억에 이르며 제2의 고도성장기를 거치게 된다.

2016년 일동제약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이루었다. 기업분할을 통해 제약 및 헬스케어사업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보다 신속하고 전문적인 의사결정을 도모키로 했다. 2013년 일동제약의 공동대표로 취임한 윤웅섭 사장은, 2016년 기업분할과 함께 사업회사인 일동제약의 단독 대표가 되며 중장기 성장동력 마련을 위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오너경영인답게 장기적인 성장동력 마련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특히 연구개발 분야에는 꾸준한 투자와 인력확보로 여러가지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어냈다. 일동제약은 지난 해, 만성B형간염치료 신약 베시보 개발에 성공, 본격적인 시장공략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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