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종 칼럼
생애말기 돌봄 체계 없이 의사조력자살 입법? "주객전도"

최근 서울대병원 윤영호 교수 연구팀이 만 19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찬반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의 76.3%가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에 찬성하고 있고, 이는 2016년 찬성 비율에 비해 5년 만에 2배 가까이 높아졌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근거로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은 말기환자로서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환자가 본인의 의사로 담당의사의 조력을 통해 스스로 삶을 종결하는 '조력존엄사'(이하, 의사조력자살)를 허용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약칭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을 올해 6월 22일 대표 발의했다.

 

의사조력자살 허용 조력존엄사, 대한민국 화두(火斗) 부상

의사조력자살 허용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자 ‘안락사’ 허용을 두고 찬반 논란이 지금까지도 뜨겁다. 국회에서는 8월 12일 의사조력자살 입법화 반대측 입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 주최로 ‘안락사 허용보다 더 시급한 과제, 생애 말기 돌봄 체계화’를 주제로, 8월 24일 의사조력자살 입법화 찬성측 입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 주최로 ‘의사조력자살, 말기 환자의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각각 토론회가 연달아 개최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左) 2022년 8월 12일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 주최 ‘안락사 허용보다 더 시급한 과제, 생애 말기 돌봄 체계화’ 주제의 국회 토론회 포스터, (右) 8월 24일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 주최 ‘의사조력자살, 말기 환자의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국회 토론회 포스터.
(左) 2022년 8월 12일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 주최 ‘안락사 허용보다 더 시급한 과제, 생애 말기 돌봄 체계화’ 주제의 국회 토론회 포스터, (右) 8월 24일 더불어민주당 안규백 의원 주최 ‘의사조력자살, 말기 환자의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국회 토론회 포스터.

우리나라에서는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하는 의사조력자살은 형법상 자살방조죄에 해당되어 의사는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안락사’에는 회복 가능성과 무관하게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영양·수액 공급 등을 중단해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키는 '소극적 안락사'와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생명을 끊도록 돕는 '적극적 안락사' 2가지가 있다. '안락사'와 개념상 자주 혼동하는 연명의료결정법상 '연명의료 중단 및 유도'는 의학적으로 회생불가능한 무의미한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 등의 연명의료를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거나 이미 시작한 연명의료를 인위적으로 중단하는 것을 말한다.

2018년 2월 4일부터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됨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도 해당 요건만 충족하면 무의미한 연명의료 유보 및 중단은 허용된다. 그러나 해외 일부 국가에서 허용되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 모두 우리나라에는 허용하는 법률이 없기 때문에 말기 환자의 자살을 도운 의사는 형법상 자살방조죄로 형사처벌 된다. 안규백 의원이 대표 발의한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도 말기환자의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는 조력존엄사를 인정하고 조력존엄사심사위원회를 통해 말기환자의 자살을 도운 의사에게 형법상 자살방조죄 적용을 배제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 환경의 현주소

말기환자를 위한 호스피스·완화의료 환경과 임종기 환자를 위한 연명의료결정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제정된 연명의료결정법은 연명의료 관련 2018년 2월 4일 시행되었지만 호스피스·완화의료 관련해서는 이보다 1년 앞선 2017년 2월 4일부터 시행되었다. 말기환자를 위한 호스피스·완화의료 환경 조성을 위한 연명의료결정법은 시행 5년 6개월째를 맞고 있지만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 등 양질의 호스피스·연명의료 관련 인프라는 열악한 수준이다.

2022년 현재 전국에 106개 의료기관이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병원으로 지정되어 운영 중이다. 전국 106개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병원 중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 49개가 집중되어 있다. 말기·임종기 환자가 많은 상급종합병원은 전체 45개 중에서 16개만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병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요양병원도 11개만 참여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전국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병원 운영 현황
2022년 기준 전국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병원 운영 현황

2020년 국가호스피스·완화의료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암 및 비암성 질환으로 사망한 환자 88,975명 중 21.3%에 해당하는 18,925명만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었다. 이처럼 우리나라 말기·임종기 환자가 호스피스 전문기관에서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을 받는 경우는 5명 중에 1명 밖에 안될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다. 우리나라는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병원과 병상수를 확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남용·악용 가능성 우려되는 의사조력자살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고 시행된지 5년 6개월이 된 시점에서 의사조력자살 허용 입법화 논쟁을 통해 사회적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기에는 아직 우리 사회는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말기 환자가 존엄한 죽음을 맞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액의 의료비나 간병 등 힘든 돌봄 부담을 가족에게 주지 않기 위해 의사조력자살을 선택할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고액의 의료비나 간병 등 힘든 돌봄 부담을 지고 있는 가족이 말기 환자에게 의사조력자살을 하도록 유도할 가능성도 있어서 말기 환자를 둔 가족 간 불신과 불화의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

보건복지부 '2020년 노인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좋은 죽음(Good Death)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는 않는 죽음(90.6%), 신체적·정신적 고통 없는 죽음(90.5%), 스스로 정리하는 임종(89.0), 가족과 함께 임종을 맞이하는 것(86.9%) 등 여러 가지로 응답했고, '가족이나 지인에게 부담을 주는 않는 죽음'이 가장 높은 응답률이 나왔다. 백세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노인들은 오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자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김대균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발표자료
김대균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발표자료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2021년 자살예방백서’를 보면 우리나라 10만명 당 노인 자살률은 OECD 회원국 평균인 17.2명 보다 2.7배 높은 46.6명으로 압도적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또한 2021년 6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노인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13%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65세 노인 10명 중 1명이 우울증을 겪고 있고, 노인자살율 세계 1위인 상황에서 성급한 의사조력자살 입법화는 ‘현대판 고려장’을 조장하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 환경 조성이 먼저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회장.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회장.

국민에게 설문조사를 통해 의사조력자살 관련 찬반을 묻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치료방법이 없는 말기 환자에게 현대 의학과 사회적 제도를 통해 제공될 수 있는 통증관리, 정서적 지지 등을 포함한 양질의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 서비스 내용에 대한 정보 제공이 선행되어야 한다.

비록 현재 우리나라의 법령과 제도와 인프라가 말기 환자가 원하는 만큼의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 서비스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양질의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이 제공되면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 방송이나 기사를 통해 각인된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는 대다수의 말기 환자가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받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려 주어야 한다. 말기 환자에 대해 양질의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국회와 정부가 만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법률을 만들어 말기 환자가 생(生)을 일찍 마감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입법이다.

양질의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 등 양질의 호스피스·연명의료 관련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는 입법은 남용이나 악용 우려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사조력자살 입법보다는 양질의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먼저다. 성숙한 생애말기 및 임종 돌봄 문화가 정착되어 남용 우려가 없어졌을 때 그때 의사조력자살 허용에 관한 사회적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다.

필자 안기종씨는 한국백혈병환우회와 한국환자단체연합회에서 대표로 활동하고 있고, 환자들의 생생한 의료현장 이야기와 목소리를 세상에 알려 환자들의 투병환경 개선과 권익 증진을 위해 뛰고 있는 환자운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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