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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 투약기는 대단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

이렇게까지 난리 칠 사안일까? 일반의약품 화상 판매기의 규제 샌드박스 도입 저지를 위한 두 차례 집회(19일 용산 대통령실 앞 집회와 20일 제22차 ICT 규제샌드박스 심의위원회 회의장 앞 집회)와 비대위원장 퇴진사태를 보며 들었던 이 생각이 며칠이 지났으나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혹시 부풀려진 공포는 아닐까?

누구나 신념을 걸고 지켜야할 것이 있듯, 약사들은 이번 사안에서 국민 건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화상판매기는 대면 투약이 무너지는 것이며, 이는 국민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화상에 약사가 나타나 상담해 줄 수 있다'는 화상판매기를 대면투약의 실종이라고 볼 근거도 약하지만, 마치 실증특례 시범 사업을 지금 당장 전국 모든 약국에서 일제히 진행되는 것처럼 과장해 걱정하며, 한층 더 비장해지는 것도 의아하기만 하다. 

지난 19일 용산 대통령실 앞 집회(왼쪽), 20일 제22차 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 앞 집회
지난 19일 용산 대통령실 앞 집회(왼쪽), 20일 제22차 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 앞 집회

 

화상 투약기, 걱정하는 만큼 대단한 기기일까?

화상 투약기 도입을 위해 발의된 약사법 일부개정법률안과 규제 샌드박스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화상 투약기는 약국 운영 시간 외(심야 시간대) 일반의약품 구매를 원하는 소비자가 약사와 화상통화로 상담을 진행한 다음 약사가 결정한 일반의약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지만 최근 약사회는 일반의약품 스마트 화상 판매기를 '약 자판기'로 낮춰 부르며 이것이 대면투약 원칙을 깨부수고, 환자를 약사가 아닌 기계에 노출시키고, 소비자 약 선택권을 빼앗는 기기로 정의했다. 정말일까? 그정도는 아닌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정부는 환자들의 의약품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편의점 상비약이 있으며 다음달 1일 부터는 '공공심야약국 시범사업'이 시작될 예정이다. 화상 투약기 역시 의약품 접근성 확대 일환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화상 투약기는 편의점 상비약보다 판매가능한 일반의약품 범위가 넓은 것은 사실이다. 약사의 관리 아래 있기 때문이다. 준용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는 보건복지부 실증특례 조건을 보면 △해열·진통·소염제 △진경제 △안과용제 △항히스타민제 △진해거담제 △정장제 △하제 △제산제 △진토제 △화농성 질환용제 △진통·진양·수렴·소염제다. 품목은 60여종으로, 편의점(3개 효능군 13개 제품)보다 많다.

그렇지만 이는 약사가 화상을 통해 상담함으로써 늘어날 수 있고, 일반의약품의 정의상 질병치료를 위해 의사나 치과의사 전문지식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의약품이라는 점에서 화상 투약기 실효성을 위한 장치들이 설정돼 있는 것이다.

남은 우려는 약사 1인당 관리할 수 있는 화상 투약기 갯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부분은 규제샌드박스 주관부처와 의약품 주관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보건복지부가 협의해야 할 사항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협의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미지수다. 화상 투약기는 21시에서 02시 등 심야시간과 약국이 문을 닫는 공휴일 등 폐쇄적인 환경에서 작동기준이 설정돼 있다. 시간이 한정돼 있고, 약사 인력이 한정돼 있는 환경인 만큼, 이 역시 실증특례를 통해 사업 실효성과 환자 안전 사이에서 적절한 기준을 구상할 수 있는 영역이다.

 

화상 투약기 실증특례, 생각만큼 부당한 사업 아냐

대한약사회를 위시한 약사들은 화상 투약기가 규제 샌드박스 실증특례 사업에 선정되는 데에는 실증특례 선정 기준인 5가지를 모두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5개 기준은 △기술 및 서비스의 혁신성 △관련 시장 및 이용자 편익 △생명 안전 △개인정보 보호 △실증특례 적정성이다.

먼저 약사들은 화상 투약기에 적용된 기술이 기존 기술을 이용했을 뿐 혁신성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전세계가 새로운 먹거리로 지목하고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인공지능 의료기기, 의료기기 소프트웨어, 디지털치료기기 등 디지털 헬스케어 제품에 적용된 기술 역시 그 자체가 혁신적인 것은 아니다.

대다수 인공지능 의료기기는 AI 학습방법 중 눈에 가장 가까운 합성곱 신경망 기술로 의료영상을 해석하는 형태로 작동한다. 의료기기 소프트웨어 역시 새로운 운영체제나 기기가 필요한 혁신 기술은 없으며, 디지털 치료기기 역시 인간의 의료행위를 일부 대체할 수 있는 기존 기술의 활용일 뿐이다.

다만 우리가 디지털 헬스케어와 이를 구현하는 제품들을 혁신적이라 말하는 것은 그간 융합되지 못했던 의료와 ICT, 데이터 기술들의 융합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상 투약기 역시 마찬가지다. 화상 통신기술, 의약품 보관 기술, 전자결제 기술, 데이터 저장 기술 등 기존 기술들의 집합체일 뿐이지만, 이들의 융합으로써 심야시간 일반의약품 접근성을 확대시키기 위해 기술이 융합된 기기로 혁신성을 인정할 수 있다.

심야시간 일반의약품 접근성 확대는 그 자체로 사용자 편익을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그 편익이 기대되나 확실치 않은 만큼 이를 실제 현장에서 사용해 근거를 확보하자는 것이다.

생명 안전과 개인정보 보호는 지난 10여년 간 업체가 수정보완을 거듭한 영역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의약품 보관에 관한 규정,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규정 등이 의약품에 적용되기 전부터 시행돼 왔다. 자동 판매기에 비치될 의약품 관리 규정은 얼마든지 설계가 가능하다.

의약품이라는 특수한 면에서 약사들이 제기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소비자의 선택권 제한'이다. 그런데 의료산업은 이미 소비자의 선택권이 제한돼 있는 것이 권한침해보다는 특수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영역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화상투약기가 도입될 수 없는 절대적인 룰은 약사법 50조(의약품 판매) 뿐이다. 50조 1항에는 '약국개설자 및 의약품판매업자는 그 약국 또는 점포 이외의 장소에서 의약품을 판매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돼 있는데 이를 부분적으로 해소함으로써 화상 투약기가 활용가능할 지를 보겠다는 것이다.

 

화상 투약기는 왜 위험한 기기가 됐을까?

이미지 소비라는 면에서 화상 투약기를 누구보다 먼저 활용하려 한 것은 다름아닌 약사다. 의약분업, 한약파동으로 처방권과 한약장을 빼앗겼던 약사들에게 또 빼앗길 것이 남았다는 것을 조명하는 것 만큼 세간의 이목을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화상 투약기에 대한 사업은 전국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부 규제샌드박스 특구에 적용되며 기계 10대로 시작해 실효성이 있을지 없을지를 보자는 말 그대로 '실증특례'사업이다.

더구나 실증특례 사업은 결코 제도화나 본 사업화를 위한 구실 만들기, 요식절차가 아니다. 오히려 백지화 할 수 있는 근거로써 작용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화상 투약기는 당장 내일이라도 약사들에게 약을 빼앗아 갈 수 있는 민간 업체 주도의 사업인양 꾸며졌다. 영웅과 빌런이 난무하는 마블 유니버스처럼 약사사회에도 약사회 유니버스가 있다면 화상투약기는 빌런으로 소모됐고 히어로들은 이를 막아내겠다는 일념으로 약사사회 주도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약사들은 화상 투약기를 왜 막아야 했을까?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막아야했을까? 국민 건강을 사기업의 이익보전 수단화로부터 막고자 했던 것인지, 약국과 약국들이 화상투약기를 놓고 겨뤄야 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미래에 태생적 거부감이 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근원적인 한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약사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안전한 의약품 사용을 위한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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