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돌 히트가 만난 상상력 부스터 ① 현지영(보험심사간호사)

"제주에 오시면, 현지영을 기억하는 누구나, 꼭 연락주세요"

2021년 11월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했던 한라산 산행은, 아이젠 없는 눈길에 붙잡혀 꼬박 9시간을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 보험약가가 주업무인 업계 지인들과 얼결 의기투합이 만든 이벤트였다. 소주를 곁들여 피곤을 풀던 제주 푸른밤 한 켠, 현지영씨가 남편과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산행의 동반자들은 CJ제일제당에서 마지막 직급이었을 법한 '부장님'이라는 타이틀로 그를 불렀다. 그러다 추억이 터져나올 땐, 그는 '현누나'가 됐다.

함께 알 법한 사람들을 끄집어내며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나에게 현지영씨는 "우리는 구면"이라고 귀뜸했다. 2005년 당시 나는 데일리팜 기자로, 그는 대웅제약 약가팀 소속으로 만났다. "아!"하는 맞장구 사이로 꼭 호의적이진 않았을 그 때의 기사 내용이 떠올라 멎쩍은 미소를 숨겼다. 제주생활을 이야기했고 업계와 끈을 놓지 않고 자문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마땅한 코너가 만들어지면 현부장을, 히트뉴스에 데뷔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제약회사에서 보험&청구 심사 컨설팅 업무를 했던 현지영씨는 제주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제약회사에서 보험&청구 심사 컨설팅 업무를 했던 현지영씨는 제주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꼬박 4년 전 히트뉴스를 기획하며 히터들의 상상력이 얼마나 소중한 자산이었는지 경험했다. 현실의 9할은 언제나 상상력의 몫이었다. 인터뷰 제안에 빼곡히 적어 보낸 자료를 읽으며 몇 가지 상상의 모멘텀에 호기심이 커졌다. 얼마 만큼의 상상이 제주살이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까. 냅다 직구부터 던졌다.

 

놀러 오는 제주와 살러 오는 제주는 다를 수 밖에 없을텐데, 삶의 터전을 옮기는 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마지막 직장이었던 CJ제일제당에 다닐 때 일이에요. 2015년 무렵 회사가 학술마케팅을 강화하면서 학술교육팀이 신설됐고 제가 팀장을 맡게 됐어요. 처음엔 재미있고 좋았지요. 전국 다니며 영업사원 교육도 했고 영업과 마케팅 부서 만족도도 높았거든요. 그러다 팀 안에서 평가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하나 둘 회사를 그만두거나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되는 일이 생겼어요. 팀장으로서 자질이 부족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사람에 대한 상처도 많이 받았고.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다 10년 전부터 생각했던 전원생활을 하기로 결정하고 2019년 5월에 제주로 왔어요."

 

왜 제주였나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버리고 나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들면서 해외로 이주할 것인지, 한국의 어느 지방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마음 한 켠엔 연세 많은 양가 부모님 걱정이 늘 있었어요.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생각하고, 이곳 저곳 알아보러 다녔지요. 그러다 제주가 떠 올랐어요. 연애 시절부터 해 마다 제주로 여행을 왔는데 남편이나 저나 언젠가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더 늙기 전에 도전해보자고 둘이 합의를 하고 질렀지요."

 

제주에서 전원생활을 어떻습니까?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제주 서귀포에요. 마당이 있는 집이고 작지만 감귤농사도 하고 있어요. 걸어서 갈 수 있는 편의점 조차 없는, 그런 환경이에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부부는 아이가 없어 이 곳 생활은 정말 단순 하지요. 하지만, 단독 주택이라 해야할 집안일들이 많은 편이에요. 겨울을 빼고는 매일 정원에 물을 줘야 해요. 마당엔 잔디, 동백나무, 병솔나무, 로즈마리, 라벤더, 수국 등 80여 그루의 나무가 있어요. 여름엔 집 주변 잡초를 제거하고, 지네 같은 벌레들 때문에 방제도 해야 해요.

그리고, 귤 농사도 손이 많이 가요. 판매하려고 키우는 게 아니라 나눠먹기 위해 하는 거라 농약을 치지 않거든요. 그래서 봄부터 가을까지 매월 방제를 해요. 제주에 있으니 여행 오는 지인들도 많아요. 그럴 때면 마당에서 고기 굽고 불멍도 해요. 아마,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더 많이들 왔겠죠?"

우리 부부는 둘다 집에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해요. 재택근무도 해야 하니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많아요. 다행히 바다가 가까운 편이라 답답할 때는 바다에 가거나 가까운 숲길을 산책해요."

 

재택업무를 하다 답답할 땐 가까운 바다를 찾는다. 현지영.
재택업무를 하다 답답할 땐 가까운 바다를 찾는다. 현지영.

 

전원생활을 상상하지만 막상 도전하지 못하는 건 경제적 문제도 있잖아요?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혹시 물려받은…

"물려 받은 건 전혀 없다고 봐도 돼요. 아이 없이 둘이 그 동안 일해 왔으니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별로 없었어요. 제주에 온 이후로는 신랑 수입 만으로도 생활은 충분해요. 감사한 일이지요."

 

제주행을 결심했을 땐 백수를 선택하신건데… 제약회사 자문은 어떻게 하게 된건가요?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에 오겠다고 했을 때 마케팅본부 임원께서 후임을 충원할 때까지 재택으로 업무를 해 줄 수 있겠냐고 제안을 하셨어요. 코로나 때문에 지금이야 재택근무가 익숙하지만 당시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거든요. 책임감을 가지고 진짜 열심히 했어요. 제약회사 경력이 있는 보험심사 간호사를 찾는 게 쉽지 않았던지, 9개월이나 지나서야 후임이 왔어요. 그때서야 제가 목표했던 진짜 백수가 된 거지요. 일을 그만두고 쉬면 좋을 줄 알았는데 생각 만큼 좋은 건 아니더라고요. 뭘 해도 만족감이 없고, 자존감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고. 가까운 병원이라도 취직해볼까 고민할 정도였어요. 그러던 차에 대웅제약에 함께 근무했던 분과 우연히 연락이 닿으면서 제약회사 자문으로 2021년 4월부터 일하고 있어요. 전국에 출장도 가고요."

 

간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제약회사 입사는 어떻게 하게 되신 건가요?

"3교대 하기 싫어 부서이동 기회를 잡은 게 제 인생의 2번째 직업을 결정할 줄 몰랐지요. 대학 졸업하고 서울백병원 병동 간호사로 근무했어요. 그러다 수간호사님 추천으로 보험심사과 발령을 받았는데, 솔직히 3교대 때문에 가겠다 했지요. 진료비 삭감이 안되도록 사전 심사하고 문제가 생기면 사후관리하고 그런 일인데, 막상 해보니 너무 어렵더라고요. 일을 배울 수 있는 기관이나 학원도 없어서 선배들에게 일일이 물어가며 일을 배웠어요. 나중에 보험심사와 청구방법을 가르치는 학원이 생겼는데 병원 다니면서 4년 정도 강사로도 일했어요. 병원과 강사 2가지 일을 병행하다 보니 갑자기 내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대웅제약이 보험심사간호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어요. 그래서 2004년 대웅제약 약사팀에 입사하게 됐어요."

 

대웅제약이 병의원 컨설팅 분야에 비교적 일찍 뛰어 들면서 영업·마케팅 툴을 차별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보험급여 청구에서 삭감되지 않는 방법을 병의원에 컨설팅해주는 거잖아요? 지금이야 보편적인 일이 됐지만 당시만 해도 선도적이었지요.

"개원의들 대상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보험심사&청구'를 주제로 세미나를 했어요. 영업사원 교육 때문에 일주일의 절반은 연수원에서 살았을 정도로요. 심평원 지원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삭감이 많은 약제의 원인을 찾아, 영업사원들에게 삭감방지 전략을 교육하는 활동을 하면서 글리아티린이나 알비스 처럼 실제 매출이 크게 늘어나는 약제들도 생겨 났어요. 이렇게 되자 약가업무 담당자 분들도 보험심사나 청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고 제약바이오협회 등에서 주관하는 강의에 불려 나가기도 했어요. CJ제일제당으로 회사를 옮긴 이후에는 영업·마케팅 일을 직접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예 마케팅본부로 들어갔어요. 심포지엄이나 제품설명회로 전국을 다녔지요. 영업·마케팅 부서의 반응을 보면서 성취감도 컸어요."

 

집 근처에 펼쳐진 동백꽃길.
집 근처에 펼쳐진 동백꽃길.

 

그러다 번아웃(burnout) 됐고 예전부터 꿈꿨던 전원생활을 위해 제주로 오신 거군요. 이런 말도 있잖아요. 육지에 살던 사람은 제주와서 3년을 못 버틴다고. 어때요?

"번아웃 보다 사람에 대한 상처와 성취감 부족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잘 하는 일이 보험심사인데 팀장이다 보니 팀원 관리에 집중해야하고… 보험심사 관련 업무에서 멀어지게 되니 제 커리어가 없어진 같은 그런 느낌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이런 저런 이유로 제주에 온 육지 분들 많은데, 신기하게도 정말 3년 안에 돌아가는 경우가 있어요. 여행 올 땐 모든 게 좋아 보이지만 막상 1년 정도 살아보면 제주의 일상은 좀 따분하거든요. 크다면 크지만 섬은 섬이니까요. 주변 인프라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하고. 저는 제가 좋아하는 보험심사 업무와 관련한 자문활동을 우연히 이 곳에서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지금까지는 만족하고 있어요. 이 정도면 행운이죠."

 

병동간호사에서 보험심사간호사로, 보험심사간호사에서 제약회사 보험심사 컨설턴트로, 그리고 지금 제주라는 전원으로 터전을 옮긴 현실 생활인이 되었어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올까요? 어떤 상상을 하시나요?

"역설적이게도 이 곳 제주에서 제 일과 관련된 꿈이 오히려 선명해졌어요. 제약회사의 영업과 마케팅에 보험청구와 심사에 대한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그런데 저 같은 보험심사 컨설턴트를 활용하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채용을 하더라도 일을 만들고 관리하는 방법을 모르는 경우도 많거든요. 이 곳에 내려와 우연히 제약회사 자문 활동을 프리랜서로 하다 보니, 이런 방식이 훨씬 비용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생긴 상상이 있어요. 제가 그동안 배우고 익힌 보험심사 관련 경험들을 보다 많은 회사들과 자문이나 교육과 같은 방식으로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요. 요즘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떤 상상이든 변화를 받아들이고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부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못다한 말씀을 끝으로 인터뷰 정리할게요.

"1년을 쉬고 다시 일하면서 든 생각이 오랜 시간 함께 했으면서도 지인들을 챙기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후회했어요. 그래서 생각나는 분들께 안부 인사를 드렸는데 다들 너무 반갑게 받아 주시더라고요. 제주에 와 있고 편하게 자주 연락하자는 말씀도 나눴어요. 제주에 오니 더 생각나는 분들이 계시네요. 불러 볼까요?

김정환, 권순봉(보령제약), 류재학(대웅제약), 문승준(종근당), 홍승현(건일제약), 황승만(대원제약), 곽달원, 김기호, 홍순근, 이병태, 고민경, 이승노, 김유숙, 김나리, 이재원, 김영지(HK이노엔), 김현경(셀트리온), 김정대(율촌), 이연재(유사파마), 김덕(한미약품), 김준수(애브비), 정광희, 이상희(한국산텐), 김지영(알리코제약), 김유현(LG), 박민철(휴온스)…

제주에 오시면, 현지영을 기억하는 누구나, 꼭 연락주세요."

 

초보농부 현지영씨가 수확한 제주감귤.
초보농부 현지영씨가 수확한 제주감귤.

 

제주살이 현지영은 누구?

◇1994~2003년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병동간호사/보험심사간호사) ◇2004~2011년 대웅제약 보험심사&청구 ◇2011~2020년 1월 CJ제일제당 ◇(현) 제주 거주, 제약회사 보험심사&청구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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