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대상포진 백신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얼마 전 미국 시애틀에 세운 '큐레보(CUREVO)'를 보면 허은철 대표(45)가 조각하는 GC녹십자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감이 커진다. 1983년 세계 3번째, 국내 최초 B형 간염백신 헤파박스 B를 개발한 것을 비롯해 신종인플루엔자가 대유행이던 2009년 세계 8번째로 백신을 개발해 '역병'을 잠재우고 안타깝게 그해 타계한 목암 허영섭은 대한민국 의료 백신의 아버지라 일컬어 손색이 없다. 허 대표는 목암의 둘째 아들인데, 아버지가 구축한 혈액제제와 백신이라는 탄탄한 구조물 위에 섬세한 조각을 하고 있다. 목암이 연구개발의 혁신 목표를 국내 시장에 필수의약품 공급과 수입 대체효과에 뒀다면, 그의 아들은 글로벌 진출을 통한 기업성장과 국부 창출에 두고 있다. 시대 환경에 조응하는 최적화 선택이라는 점에서 유전자의 힘이 느껴진다.  

시애틀의 큐레보는 미국에서 프리미엄 대상포진 백신 개발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4년 목암이 설립한 이래 녹십자 연구개발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는 목암생명공학연구소가 확보한 파이프라인을 큐레보가 현지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하며 개발하는 것이다. 보유한 파이프라인 기술은 이미 회사가 프리미엄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힌트가 있는 것같다. GSK의 항원재조합 백신 싱그릭스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 장점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싱그릭스는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 한 시대를 풍미한 MSD 조스타박스를 세계 곳곳에서 대체하기 시작했다. 싱그릭스에 비해 속도에서 늦었지만, 발기부전치료제 시장에서 '퍼스트 인 클래스 비아그라'에 이어 나온 시알리스가 '베스트 인 클래스'의 지위로 선전한 사례를 보면, 가능성은 여전히 희망적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연구 개발의 최종 목표, 어디에 있을까? 임상시험 결과가 훌륭하게 나오면서 개발도 순조롭게 진행돼 FDA에 허가를 받고, 미국 시장에서 판매를 시작할 수 있다면 최상의 성과일 것이다. 하지만 허 대표의 전략적 선택은 고전적 전략처럼 '파이프라인 확보→임상시험 진행→FDA 허가 절차 진행'이라는 단선으로 흐르지 만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2015년 공동 대표(2016년부터 단독대표)로 경영전면에 나서기 전 그의 경력 때문이다. 다른 회사 2세, 3세 후계자들의 통상 경로와 달리 허 대표는 R&D기획실 상무, 최고기술책임자(CTO) 등 연구개발(R&D) 기획 전문가로 자신을 고도화시켰다. 'R&D=마케팅 전략'이라는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의미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목표점은 매우 유연할 것으로 보인다. 개발 과정에서 마케팅 역량과 더 큰 자본을 가진 '미국 꿀벌'을 유인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GC 녹십자의 다른 한 축인 혈액제제 부문의 글로벌 정책은 담대하다. 국내기업 가운데 세계보건기구(WHO)나 범미보건기구(PAHO)를 지렛대삼아 백신의 글로벌 비단길을 열었다면, 혈액제제 부문은 국내 오창공장과 연동되는 글로벌 캐나다 생산기지의 현지화 정책을 믹스해 선진시장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올해 FDA 허가가 유력한 '면역글로블린 IVIG-SN'의 본격적인 마케팅을 앞두고 판매법인 신설, 현지 세일즈 전문가 영입, 신규 조직 신설도 본격화하고 있다. 이는 잘 나갈 것으로 보였던 글로벌 임상이 삐끗하는 등 R&D에서 산전수전을 경험한 허 대표가 이젠 "연구개발엔 리스크가 있다"고 담담하게 말할 정도로 다양한 변수를 통제할 역량을 갖췄기에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매출 성장이 절대적이지도 않고, 목표를 두지도 않겠다는 말 역시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허 대표가 조각하려는 머릿속 구상은 사실 'GC 녹십자'에 담겨있다. 백신과 혈액제제 사업이 녹십자와 잘 매칭되는 이미지 였으나, 창업 51주년이 되는 올해 'GC'라는 생소한 접두어를 선보였다. 글자 그대로 Green Cross, Global Company의 약자로 읽어도 좋겠지만, 아버지와 자신을 연결시킨 작은아버지 허일섭 회장과 교감해 나온 Great Company라는 의미도 함축돼 있다. 그는 위대한 글로벌 기업을 조각 하기 전에 '몰입과 헌신', '도전'이라는 다짐을 그의 마음과 함께 'GC 녹십자'에 먼저 새겨 넣은 것은 아닐까? "과거 50년이 더 야성적이었다"며 아버지와 선배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그는 단독 대표가 된 이래 연구개발비를 늘리며 작년 4가 독감백신 등 5품목의 허가를 받고, 6개 파이프라인의 임상시험 승인을 확보했다. 현실을 직시하며, 전략적계산으로 미래를 꿈꾸고 도전하는 40대 CEO에게 자꾸 눈 길이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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