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약사의 간헐적 독후감 [1] '이렇게 일만 하다가는'

밤에 인터넷 강의를 하고 나면 머리를 많이 써서 그런지 꽤 늦게까지 잠이 오질 않는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또 '하루 늦게 잔다고 뭐 어찌 되나'싶은 심정으로 새벽 1시가 넘어 과감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전 EBS 캐나다 동부 기행을 보고 알게 된 장성민 약사님의 책을 주문해둔 게 생각나 궁금한 마음에 기대감을 안고 읽어 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나도 작가인지라 이 정도의(뒤에 설명이 나온다) 책은 대체 몇 쇄일까? 궁금해져 맨 뒷장을 보니 2쇄라고 되어 있어 깜짝 놀랐다. 요즘 트렌드인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지금 열심히 사는 것보다는 그냥 오늘 아메리카노 한잔을 즐기자'는 문화에 맞는 제목에다가(심지어 우리 라됴 작가도 내게 오~ 트렌디한 제목이네요라고 칭찬을) 내용은 정말 이제껏 보아온 그 어떤 책보다 재미나고 단어 선택이나 필력 또한 탁월하다 느껴지는데 겨우 2쇄라니 저자가 약사라 그런 건가 출판사가 홍보를 못한 건가? 이즈음 되면 약 18쇄 정도 가줘야 말이 되는 것 같았다.

나도 어디 가면 '약사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사실 난 인문학적 소양이 있고 다양한 문화를 아는 집단에 끼어있으면 그저 '이과생 너드'일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지은이는 굉장히 열려있고 누구와도 '위 아더 월드'스러운 유연함을 지녔다. 오건영 약사님이 왜 나랑 잘 통한다고 알려주셨는지 얼핏 알 듯도 했다. 어릴 적부터 외국어 공부를 좋아했던 나는 그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각'에 호기심이 많았다. 한 때는 한국에 태어나 여기서만 평생 살다 가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조금씩 다른 나라를 다 옮겨 다니면서 살고 싶었고(물론, 결혼을 해서 이 상상은 더이상 하지 않는다. 그냥 한 3개국 정도로 추려졌을 뿐) 여행을 가면 꼭 유명한 음식점이 아닌 동네 사람들이 권해주는 곳에 가서 밥을 먹으며 시장에 가 사람 사는 것도 보고 얘기도 해보고 하는 것이 좋았다. 이 책을 읽으며 정말 흥미롭게 느꼈던 점은 저자 또한 여행을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친화력이 좋다.

장성민약사의 여행에세이 '이렇게 일만 하다가는'

나는 원래 사람에 대해 '겁'이 많다. 비행기 옆자리에 아주 잘 생긴 중국인 유학생이 인사를 건네며 이메일 주소를 물어봐도 꼭 알파벳을 하나 틀리게 가르쳐주거나 여행지에서 같이 어딜 가보자는 사람이 있으면 숙소에서 엄마가 기다린다며 서둘러 빠져나오곤 했다. 게스트 하우스는 무섭다며 가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단체로 가는 여행은 코스가 싫어서가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과 다닌다는 게 싫어서 혼자 쏘다니는 여행을 주로 했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 평소에도 남편 아니면 엄빠와만 놀고 의외겠지만 모임도 싫어한다. 때문에 저자의 그 용감한(내가 느끼기엔) 여행 이야기를 읽으며 뭔가 내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만족감 또는 호기심이 충족되는 기분을 느낀다.

나도 꽤 잘 돌아다닌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무모한 여행 이야기란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나란 사람의 과감함은 끽 해야 아무 계획없이 하루 전에 비행기표 끊기, 만따니니 섬이 이쁘다는 말에 갑작 jetty point서 아무 배나 잡아타고 가다가 정말 부서지기 직전인 배가 40분 가까이 물살을 무섭게(바닷물에 도전하듯 붕 떴다 착지하는 방식으로 운전하는 배다. 그것도 옆 배랑 경주까지 하며 파도가 다 들어와서 눈을 뜰 수가 없다.)가르며 도달한 망망대해를 보며 정말 하늘 아니면 바다요 어딜 봐도 파랑색인 상황에 '아...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진심 들면서 '그럼 어떠냐.. 이쁜 데서 죽었지 않느냐'며 정신줄을 아예 놓고 있기 뭐 이 정도. 잘 가지 않는 곳이라 해봤자 다 알고 있는 랑카위 섬 정도 가서 갑작 감염 증상이 나타난 엄마를 위해 아무 약국이나 들어가 '나 약사야. 내가 지금부터 therapeutic에 대해 말해볼게 블라블라..이럴 때는 cipro를 써야해. 그러니 나한테 cipro 좀 팔아라'고 대뜸 말하며 처방전이 필요한 약을 '강남 스타일 알지? 내가 너 한국오면 강남에 데려가줄게. 내 이멜은 이거다'고 해서 사온 기억 정도.(이 약사는 너무 고맙게도 내가 기침이 너무 난다니 FDA에서 금기 규정한 약까지 주며 3개월을 괴롭히던 내 기침을 고쳐줬다.) 아 맞다. 난 그때 심지어 운전석, 방향등 조작키 좌우,위아래가 모두 반대인 차를 겁도 없이 몰고 약국 찾아 삼만리 갔었지..

암튼, 그냥 일반적인 사고에서 보자면 나란 사람도 자유롭고 엉뚱하기 짝이 없으나 이 책의 지은이인 장약사님은 그 정도의 레벨이 아니시다. 엉뚱하고 무모한 것은 내가 더 심하지만(이 분은 하와이서 살고 싶다 생각하며 생활비까지 뽑아보고 학비까지 알아보신 분이지만 난 과거에 캐나다 그냥 갔다. 올 봄엔 늙어서 하와이에 살거라며 지금 빚내서 하와이 신축콘도 사러 간다고 해서 남편을 걱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여행 가신 곳곳마다 '이런 곳이 있었나'하는 지명이 나오고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들을 읽으면 '친화력 갑, 재치 만점'이란 생각이 들며 더 대단한 점은 이야기의 마무리다.

꿈에 대해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치관을 심어주는 책을 혐오한다

사실 나는 꿈에 붕 떠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꿈에 대해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치관을 심어주는 책을 혐오한다. 내게 상담을 하는 많은 젊은 처자들은 대부분 본인의 노력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고 그저 꿈꾸는 미래의 청사진만을 갖고 싶어 하며 젊은이들에게 꿈에 대한 이론을 주입하는 저자들은 그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사실 본인의 강연비만 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항상 굉장한 현실 감각을 잃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에도 '여행길의 낯선 숙소에서 두고 온 한국의 제 방을 생각할 것을 이제 저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듯 매 이야기마다 한 가정의 가장임을, 열심히 일 할 수 밖에 없는 직업인임을 잊지 않고 있다. 이런 균형 감각을 갖고 잠시 일상을 떠나 재미난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이야기란 정말 unique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를 하며 매일 실장님께 혼나 본 나로서는 책을 읽을 때 단어 선택이나 문맥을 유심히 보는데(그런 니 책은 왜 그러냐 뭐라 하시지 말길. 옛날에 쓰지 않았나, 지금은 글 잘 쓸지도 모른다.) 저자는 적시적소에 공감을 끌어내는 단어도 잘 선택하고 문장도 꽤 글빨이 좋다고 느껴진다.

요즘 유행하는 인생 편히 살자는 콘셉트의 best seller들과는 확실히 다른 책이다. 첫째,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내 이론은 이거다 넌 인생 이렇게 살면 돼' 이런 설명 따윈 없다. 꼰대같은 평가질도 하지 않는다. 둘째, 정말 흘러가듯 여행하는 기분이 들면서 순간순간 나의 과거 여행들에 대해 추억하게 해준다. 셋째, 그런 시간들로 인해 나의 감정과 생각이 풍부해진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란 생각이 들지만 결국 나는 또 현실에 발을 붙이고 하루를 잘 살아내면 되겠구나 싶은 위안을 준다.

블로그에 누군가 하루키 여행기와 비교했던데(난 뭐에 관심을 가지면 좀 들이판다. 다른 사람 리뷰까지 읽었다ㅋ) 사실 하루키 책은 '난 열심히 달렸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여긴말이야... 나란 사람 그 힘든 장편 쓰는 사람' 이런 류의 어조가 여행기에도 좀 배어있다. 뭔가 님은 굉장한데(진심 존경한다.) 나란 사람 멍청이란 기분이 들게 하는데 그에 비해 이책의 어조는 굉장히 덤덤하고 쿨하며 소소한 행복감을 준다.

아무튼, 흔한 '때려쳐라 놀자'이런 류의 책이 아니고 '부러운 나의 럭셔리 여행을 보라' 이런 책도 전혀 아니며 아주 특별한 내용의 '알로하'하고 '메리'한 책이다.(읽어보면 이해된다.) '여차하면 빡세게 살 뻔 했지' 또는 '4가지 없는 사람에게 미소로 화답하기'이런 말장난 하는 책들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다. 사실 내 책은 5쇄도 감사할 일이지만 이 책은 진심 28쇄를 향해 가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random act of kindness를 한번 실천해볼까 싶다.

 

이지현 약사

서울약대 및 대학원 졸업, 사회약학 박사수료
캐나다약사 러닝센터 팜디스쿨 대표
동국대학교 약학대학 외래교수
KBS1 라디오 주치의 '내약사용설명서'코너 진행
<내약사용설명서>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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