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바이러스와 전쟁에서 획득한 약사의 새 역할

매일 금세 숨이 차오르는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의 고립감을 견디면서도 얼마지나지 않아 코로나19도 사라질 것이라고 주변에 제법 희망을 이야기했었지만, 중대본 발표의 확진자 숫자에 따라 내 믿음도 출렁거렸다. 특히 31번 슈퍼 전파자로 인해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때 누가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처럼, 기적처럼 코로나19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5월의 녹음과 일상이 예년보다 더 애틋하고 감사하다. 흔들림 없이 방역 리더십을 보여준 질병관리본부 등 정부와 의사, 간호사, 약사, 수많은 지원 인력, 그리고 선진시민의식을 보여준 대한민국 국민들이 함께 바이러스로부터 그토록 그리워했던 일상의 일부를 되찾아왔다.

바이러스와 항전했던 곳곳에 영웅들이 즐비하지만, 이 글에서는 공적 마스크 판매 현장에서 악전고투한 약사와 약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긴박해진 코로나19 상황에서 정부와 사회가 공적 마스크 판매처로 약국을 호출했을 때 김대업 대한약사회장을 비롯한 약국들은 일부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 기꺼이 부름에 응했다. 국민들은 매일같이 마스크를 구매하려고 약국 앞에 줄을 섰고, 충분치 못한 물량 때문에 빈손으로 돌아섰던 국민들은 화가 난 상태로 이튿날 다시 줄을 서 약사들에게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 놓았다. 말로써, 빵과 우유로 감사를 표시한 사람들도 드물게 있었지만, 약사들의 일상이란 힘겹게 마스크를 팔고 그 보다 훨씬 많은 욕을 듣는 것이었다.

어렵게 마스크를 손에 넣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약사와 약국을 상대로 애증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우리 사회 안에는 과연 '약사란 무엇 이었던가' '약국이란 무엇 이었던가'와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겨나 약사와 약국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2000년 7월 의약분업이 시행된 이후 의사 처방에 따라 전문의약품을 조제하고, 일반의약품에 한해 직접 판매하는 의료시스템이 고착되면서 약사와 약국의 존재감이 다소 희미해 졌던 것은 사실이다. 약사들이 처방 조제한 의약품을 설명하고, 소비자들에게 복약상담을 해주면서 새로운 역할을 찾으려 노력할 때조차 시민들은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공적마스크를 판매하는 약국 (사진제공=참약사약국 김병주약사)
공적마스크를 판매하는 약국 (사진제공=참약사약국 김병주약사)

처방조제와 복약상담, 의약품 판매와 같은 '약사들의 고유한 역할과 동떨어진 마스크 판매'를 거부하지 않고 힘겹게 지탱할 수 있었던 데는 약사들이 자신은 물론 약국과 약국 안에 진열된 모든 것들을 공공재로 인식하는 그들만의 직업적, 윤리적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누가 감염자인지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마스크 구매를 위해 넓지 않은 약국에 머물도록 허용하고, 종종 그들로부터 튀어나오는 육두문자의 불평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적 공공재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인 덕분이다. '약사를 마스크 판매원으로 만든 회장은 물러나라'는 일부 약사들의 비판을 감내한 선출직 김대업 회장의 리더십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약 약사들이 약사법에 의한 독점적 면허로 주어진 의약품 조제와 판매라는 고전적 역할에 숨었다면, 약사와 약국의 공공성이 이 사회에서 이처럼 선명히 부각되지 못했을 것이다. 코로나19 마스크 판매처럼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약국을 찾을 일이 또 있을지 모르겠으나, 약사와 약국은 가장 낮고, 험한 일을 통해 감염질병의 방역에서 '지역 전파 차단과 지역 건강의 중심자'라는 '새로운 역할을 획득'하게 됐다. 너무 오랜 기간 마스크를 쓴 탓에 생긴 생활치료센터 의사와 간호사 얼굴의 상처들이 희생의 상징으로 떠오르듯이 마스크만 보면 2020년 봄, 약국 마스크 판매의 추억 역시 공공이라는 이름의 헌신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던져진 과제는 '새롭게 획득한 약국의 공공성'을 일회성 감사의 박수만으로 끝내지 않고,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감염 질환 방역은 물론 만성질환을 예방 관리하는 의료시스템 안에서 적극 활용하는 일일 것이다. 2020년 바이러스 전쟁에서 보여준 것처럼 의사와 약사, 간호사 등 각자의 역할들은 갈등없이 제 역할을 해냈다. 모든 부품들이 제자리에 자리잡아 제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의 명품시계가 탄생해 작동하듯 국가면허에 의해 뒷받침 되는 모든 직능의 공공성이 조화롭게 배치되도록 정부의 고민은 그래서 필요하다. 약학 기반의 의약품 정보가 지역 주민의 건강 증진에 기여하도록 약사들의 제2, 제 3의 새 역할 획득 노력또한 동반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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