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학들, 소금처럼 세상의 부름에 응답한 팔방미인의 평전 내

서재를 사랑했던 남자, 대하 홍문화 박사 생전의 모습
서재를 사랑했던 남자, 대하 홍문화 박사 생전의 모습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인 대하 (大河)홍문화 선생의 '고요하고도 열정적이며, 영역을 넘나들며 다재다능했던 아흔 한해 삶'이 후학들에 의해 재조명 됐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학역사관은 3월 9일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라는 평전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발간했다.

380여 쪽으로 구성된 평전은 ▷홍 박사의 생애 ▷논설 및 논술, 수필 등 홍 교수가 남긴 글 ▷홍교수와 인연을 맺었던 현재 인물들의 회상 ▷후손들이 바라본 홍교수의 면모 ▷약력 및 자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심창구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학역사관 명예관장(서울대명예 교수)은 "(홍 교수님은) 약계만이 아닌 우리나라 당대의 최고 명사가 되셨다. 늘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교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더 늦기 전에 기념 책자를 만들어야 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고 편찬사에서 밝혔다.

1916년 5월 1일 평안남도 안주읍 홍천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홍문화 박사는 2007년 7월 28일 영면하기까지 의사, 약사, 교수, 대한약사회장, 국립보건원장, 의약문필가, 건강지식 전도사, 주례박사 등 다양한 이름으로 활동한 팔방미인이었다.특히 주례는 평생 4000번 이상 선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홍 박사의 삶의 태도는, 서울약대 6회 졸업생 53명의 얼굴이 담긴 1952년 졸업 앨범의 게재시 <소금에 붙이는 독백>의 소금을 지향했다.

소금에 붙이는 독백

Na의 양성(陽性)과 CL의 음성(陰性)을 한 가슴에 간직하면서도
전설의 호수처럼 고요한 중성(中性)
환경의 온도야 높거나 말거나
한결같은 용해도를 지니는 절개(節槪)
너! 땀 흘려 일하는 사람 이마 위에
즐겨 결정(結晶)하는 심사(心事)여
아! 그 이름은 소금
너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쓰리오

땅에 버리어 밟힐 뿐이니......
세상에 들끓는 온갖 싱거움과 오탁(汚濁)을
도맡아 조미(調味)하고, 방부(防腐)하여 주려무나!
(이 시는 1955년 1월 31일자 학보 약원 제 2호에도 게재)

서울대 약학대학 약학역사관이 발간한 평전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의 표지
서울대 약학대학 약학역사관이 발간한 평전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의 표지

1934년 19살의 나이로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 서울대 약학대학 전신)에 응시해 4등의 성적으로 합격해 수학하고 1937년 3월 졸업생 52명(한국인 16명, 일본인 38명) 가운데 6등으로 졸업했다. 졸업 직후인 이해 4월부터 1941년 8월말까지 4년 5개월간 조수로 근무했다.

그는 1938년 9월20일 일본 식민국 어디서든 자격이 부여된 조선약제사가 됐다. 1941년에는 의사면허 자격시험에 합격해 그해 12월 23일 의사면허를 받았다. 1942년부터 3년간 경성제대 부속병원(서울대병원 전신)에서 임상 수련을 했다. 이후 잠시 의원을 열었다가 접었다.

의원을 접은데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1987년 의사학의 대가인 김두종 선생과 대담(광장 164호)에서 "이게 할 노릇이 못돼요. 죽어 가는 사람 보면서 돈 안내면 주사 안 놔 주겠다,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 싶어  전부 집어치우고 도로 공부 길로 갔다"고 회고했다.

나라 인재부족으로 한 사람이 두 대학의 교수 겸직이 허용되던 시절, 서울대 약대교수이면서 중앙대 약대 교수였던 그는 1955년 미국 파이포 약학교육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퍼듀대 약대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석사학위를 받았고, 1962년 서울대에서 1호 약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길에 오르던 1955년 9월17일. "새벽에 눈을 뜨니 비바람이 요란하다. 하필 출발 날이 이 모양이어서 못 떠나가게 될 것을 자못 근심하면서, 그래도 기상하여 부슬부슬 행장을 차리노라니 비도 차츰 부슬부슬해지고 환송객 수삼인이 찾아오니 이제는 참말 가게되는가 보다..." 그는 유학을 떠나 퍼듀대에 정착하기 한달동안 메모를 남겼다.  

퍼듀대에서 언어 때문에 어려워했던 상황도 메모로 남겼다.

외국어

미국에 와서
미국 강아지에

손질을 하면서
말을 걸었더니
와서 꼬리를 치면서
반긴다.
미국 사람은 한국말을 모르지만
강아지는 한국말을 알아듣는 것을보면
강아지가 사람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닌가
강아지는
세계 일주를 하여도
나처럼
10개 국어
단어책이
필요없을 것이니까
부러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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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초중반 무렵 전주에서 개최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호남선 버스를 탔을 때 바로 옆 자리에 앉았던 노학자, 홍문화 박사는 TV에 나와 건강지식을 전달할 때처럼 부드럽고 옅은 미소를 건넸었다. 심창구 명예관장이 우편으로 보낸 이 책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홍 박사의 미소가 떠올랐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약학역사관(02-880-4182)

PS, 52면 QR코드 2개가 있는데, 휴대폰 카메라를 대면 홍 교수님의 구수한 건강강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뒷 표지 QR코드도 확인하면 '무엇인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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