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김선진 플랫바이오 회장

혁신 신약개발을 위한 임상이행/중개연구의 필요성(5. 끝)

잠시 일탈, 글쓰기에 몰두했다. 푹 빠져 있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20년을 조금 못 채운 텍사스 대학교 MD 앤더슨 암센터(The University of Texas MD Anderson Cancer Center)에서의 교수생활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지 이럭저럭 4년차에 접어든다. 산업계(industry)와 캠퍼스는 같은 듯 하면서 다른 분위기다. 임상이행/중개연구, 신약개발이라는 30년을 넘어 해왔던 같은 일을 하는데도 무언가 어색하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다. 솔직한 내 심정이다. 맞다/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어울리지 않고 겉도는, 조화가 안되는 정장을 입고 있는 듯 하다. 턱시도를 입고 축구를 하거나 수영복을 입고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하는 느낌이라고 하면 와 닿을까?

특히 그동안 꽤 오래 몸 담아왔고 비교적 내가 굉장히 잘 한다고 생각했던 분야인 임상이행/중개연구에 대한 괴리가 컸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만 옳다,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틀렸다라는 것이 아니라 성공스토리가 많이 쓰여진, 그리고 자타의 인정을 받는 세계적인 기관에서 배우고 겪었던 지식과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솔직히 '전달'하고 싶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 듯 하다. 마침 최근에 젊고 유능한 연구자들과 의기투합해서 차린 회사의 마일스톤 몇 개가 달성됐다. 아직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진열대에는 장인이 한땀 한땀 공들여 만든 명품이 진열되기 시작하는 신호탄을 올린 것이다.

성취한 후의 허탈감이라고 할까? 잠깐이라도 뒤를 돌아보며 한숨 돌리고 싶었고 손가락이 키보드로 향했다. 어쩌면 그것은 긴장을 풀고 휴식의 자락을 잡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담금질하는 성스러운 행위였을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말미에 쓰는 감사의 말을 우선 여기서 한다. 산업계로 돌아와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닿은 홍숙 기자가 히트뉴스에 마련해준 소중한 여백을 이 형편없는 졸필로 채울 수 있는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안되겠지만 졸필을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와 이해를 구한다.

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던 글이었으니 마음에 드는 내용보다 그렇지 않은 구절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하고 싶었던 말을 아주 조금이라도 했으니 목적은 달성했고 마음은 후련하다. 이제 찰라의 꿈같고 즐거웠던 글쓰기를 끝내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할 시간이다.

 

신약개발 과학자의 덕목 '정직·성실·이음·영역·준비' 

나의 본연의 자세는 무엇인가? 외과전문의과학자(surgeon scientist)로 불려왔다. 과학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영광이다. 적어도 내가 다섯가지의 덕목을 충족시켰다는 증빙이기 때문이다. 이 덕목을 키워드로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정직이다. 과학자는 데이터로 대중을 감동시킨다. 수려한 문장이나 물 흐르는 듯한 언변, 달변이 아니라 정직한 데이터, 즉 재현이 가능하고 그 다음의 데이타를 만들기 위한 밑거름이 되는 솔직한 데이터를 도출할 수 있다면 홍보성 기사를 만들어 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둘째, 성실이다. 과학자는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화려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남들에게 보여주는 무대가 아닌 무대의 뒷편, 음지에서도 묵묵히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셋째, 이음남김이다. 과학자는 자신의 뒤를 이어 더 높은 곳에 올라 더 큰 업적을 이룰 다음 세대-후배, 제자를 배출해야한다. 이는 사회에서 단절없이 계속되는 자신의 공헌의 자취이며 흔적이다.

넷째, 영역이다.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는 일은 공통점이 있다. 잘못된 만남이다. 쉬운 예로 과학계에 정치를 끌어들이거나 정치의 장을 과학계가 기웃거리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고관대작의 힘을 부러워하고 기관장이 누리는 화려함과 호사를 부러워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초라함, 박탈감, 억울함과 무력감은 잘못된 상대와 나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젊은 연구원들과 어울려 실험을 하고 토론을 하고 늦은 시간에 대포집이나 맥주집에서 막걸리, 맥주를 함께하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개똥철학(!)을 안주삼아 토론하는 즐거움, 세상에 어느 것보다 고급스럽고 우아하고 고상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섯째, 준비이다. 과학자는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임상의가 진료를 할 준비, 연구자가 실험을 할 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 중요한 준비가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잠시 머물 뿐이다. 힘이 있을 때 힘을 빼앗기기 전에 힘을 내려놓고 물려줄 준비, 정상에 올랐을 때 굴러 떨어지기 전에 스스로 내려올 준비를 해야한다.

흔히 우리들이 현역에서 보직을 놓고 여러 활동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는 것을 뒷방 xxx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뒷방으로 보내지기 전에 미리 아담하지만 손님 맞이에 손색없는 방을 꾸미고 소품으로 놀이거리를 준비한다면 무기력한 입주자가 아니고 뒷방의 주인, 젊은 오빠 과학자로서의 가운을 벗고 피펫(pipette)을 내려놓는 마지막 분초까지 초라하지 않고 당당하게 보낼 수 있다.

 

진정으로 부러워할 줄 아는 과학자가 성공한다

위의 다섯가지 덕목을 지키기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 '유혹'이다. 기대했던 완성도, 완벽한 결과에 조금 못 미치는 힘들게 수행해 온 실험의 마지막 결과, 동물 실험의 이미지, 조직병리 검경 사진들에 손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세상에서 나의 가치를 판단해주는 논문수와 게재 저널을 남들만큼, 아니 남보다 더 높여서 좋은 자리에도 가고 싶고 남들의 부러움과 주목을 받고 싶은 것은 자연의 이치다.

하지만 불리한 숫자나 이미지를 빼는 소심한 바늘도둑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아예 없는 데이터를 만들고 이미지를 그리고 섞어 버리는 대담한 소도둑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시기, 질투라는 못된 사고방식이 있다. 자리, 직책, 과제, 업적을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것이 고유영역이 무너지고 남의 영역을 자의건 타의건 침범하게 되는 것이다. 영역이 무너지면 고유의 기능과 책임을 망각하고 뒤섞여 뒹구는, 잘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방해하고 잘못하게 해서 이기려는 아비규환이 벌어진다. 자연히 자리, 직책, 과제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며 싸움에서 패한 측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과학적 업적보다는 정치적 인계선을 종종 이용하려고 한다. 그런 집안이 잘 될 리가 없다.

그 반대가 부러움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 농담을 하는데 과학계에서는 아주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부러움은 진정한 축하를, 긍정적·생산적이며 도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훌륭한 결과를 만들고, 신물질을 기술수출하고, 이것이 왜 부럽지 않은가? 하지만 결과적으로 임상이행에 실패하고 기술 수출된 물질이 되돌아 올 때 그들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 지켜봤다. 또 이로 인해 그들이 받는 충격과 상처는 또 얼마나 고통스럽고, 잃어버린 신뢰의 회복이 얼마나 힘든지 지켜봤다.

결국 이 영향은 결국 그들만이 아닌 바이오 업계 전체가 상처를 입는다는 것도 충분히 학습했다. 우리들은 그들의 업적이 상용화까지 성공하도록 진정으로 걱정하고 기원해주며 부러워하고, 그들은 혹시라도 끝까지 완주하지 못했을 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표해야한다. 진정으로 부러워할 줄 아는 과학자들만이 성공할 수 있다. 경쟁자와 적을 혼동하면 안된다. 어떠한 이유로든 여러사람이 힘을 합쳐 표적(target)을 정하고 모함하고 따돌리고 매장시켜버리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 사회다.

 

우리는신약개발 전쟁에 뛰어든 '전사'

다행인지 불행인지 과학계에서는 이런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우물 안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인정받고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좁은 우물 속에서 졸졸 솟아나는 물이라도 빼앗아 먹으려고 아등바등 할 필요없이 언제든지 우물 밖으로 나가서 돈을 주고 생수를 사 먹을 수 있는 세상이 왔기 때문이다. 혹시 적이 있다면 마음을 열고 경쟁자로 만들어 함께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다.

베풂이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 '베풂'이야말로 과학자의 최대 덕목이라 생각한다. 베풂은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동료들에 대한 배려, 나눔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이는 다같이 잘되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특별한 문제가 없을 때에는 그냥 각자 알아서 하다가 장애물을 만나고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만 힘을 합쳐 밑에서 밀어 올려주고 위에서 손 내밀어 건져 주어도 충분할 것 같다.

후배, 제자들이 나를 딛고 앞으로,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게 조언하고 훈련시키고 격려를 하는 것도 과학 토양의 가장 좋은 밑거름이다. 나보다 젊어서 더 좋은 자리를 얻고, 더 큰 지원을 받고, 더 높은 수준의 연구를 해서 나조차도 이룩하지 못한 업적을 내며 많은 것을 누리는 후배나 제자들은 시기, 질투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이 알아주던 말던 그 속에는 나의 공헌이 있음을 누군가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아무도 없다는 오판은 하지 않길 바란다. 적어도 나 자신은 알고 있으니까. 꼭 박수를 받고 형식적인 보상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스스로 대견해서 빙그레 웃을 정도만 되어도 성공한 삶이며 후회없는 인생이다. 때가 되었을 때 정상에서, 무대에서,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올 준비를 하고 당당하게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다음 세대를 위한 큰 베풂과 배려다.

그리고 그 베풂과 배려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초라하지 않고 당당하게 어두워지는 조명을 뒤로 하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모습은 마지막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관객들이 아주 오랫동안 낭만적이고 멋진 장면으로 기억해 줄 것이다. 평생 달려온 템포를 늦출 때를 아는 것, 물러나서 여유있고 또 다른 세상을 즐길 줄 아는 것도 지혜로운 삶이다.

이제 맺음말을 쓸 공간만 남아있다. 하고 싶은 말, 전해주고 싶은 글은 365일이 부족할 정도로 많지만 과학자 본연의 자리로, 미래가 유망한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행운과 영광에 감사하며 치열한 경쟁과 피말리는 성공과 실패의 법칙이 있는 게임을 즐기러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어떤 맺음말이 적당할까 잠시의 고민을 하다가 월남전에 참전했던 실존 인물인 할 무어 중령(General Hal Moore)의 생생한 체험을 영화화 한 위 워 솔저스(We were soldiers)의 한 대목으로 정했다. 대본이 아니고 영화를 돌려보며 받아쓰기를 한 것이라 오기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자수한다.

Look around you. In the 7th cavalry, we’ve got a captain from the Ukraine, another from Puerto Rico.

 

We’ve got Japanese, Chinese, Blacks, Hispanics, Cherokee Indians. Jews and Gentiles. All Americans. Now here in the States, some men in this unit may have experienced discrimination because of race or creed.

 

But for you and me now, all that is gone. We are moving into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where you will watch the back of the man next to you, as he will watch yours.

 

And you won’t care what color he is, or by what name he calls God. They say we’re leaving home. We’re going to what home was always supposed to be. Now let us understand the situation. We are going into battle against a tough and determined enemy.

 

I can’t promise you that I will bring you all alive. But this I swear, before you and before Almighty God, that when we go into battle, I will be the first to set foot on the field, and I will be the last to step off, and I will leave no one behind. Dead or alive, we will all come together. So help me, God.

이것을 맺음말에 끌어다 붙이는 것이 약간의 무리수가 될 수도 있겠으나, 출정을 앞두고 연병장에서 참전하는 부하들과 그 가족들 앞에서 한 명연설(적어도 필자의 기준에는)로 모두와 공유하고 싶었다. 우리가 맞닥뜨릴 현실,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 나를 믿고 따를 부하들에게 하는 맹세…

지금 바이오 업계에 뛰어든 우리들의 이야기, 젊은 과학도, 연구자들을 이끌고 신약개발을 하려고 하는 중견급의 과학자들이 새겨들어도 좋을 내용으로 생각돼 감히 소중한 지면에 옮겨 놓았다. 우리는 난치병·불치병을 극복할 신약개발 ‘전쟁’에 뛰어든 전사들이다. 더불어 우리들의 싸움은 과거의 역사(”We were soldiers”)가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다.

We are soldi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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