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매유통, 작은 것 몇 개 얻은 대가로 본질 잃을 판

작년 12월 27일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제약업종 표준대리점거래계약서(표준계약서)'를 처음으로 제정, 공포했는데 이날은 의약품도매유통사에 상징적인 획이 그어진 날로 기억될 것 같다.

본질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상인도매상(merchant wholesaler)인 의약품도매상이, 이날부로 공정위에 의해 제약사의 '판매 대리점(selling agent, agency marketing)'이 된 날이기 때문이다.

표준계약서 머리말과 21개 조목 및 부속 별지를 보면, 의약품도매유통사가 제약사의 '대리점'으로 되어 있다. 표준계약서 양식에 대리점이라는 용어가 무려 117번이나 나온다. 같은 날 자동차판매와 자동차부품 업종의 것도 제약업종과 함께 제정·공개됐다.

자동차판매 업종의 경우 '대리점'이란 명칭은 성격상으로 봐 실제 있는 그대로이므로 자연스럽지만, 의약품도매상이 제약사의 '판매 대리점'이 된 것은 아주 생뚱맞다.    

그렇다면 '대리점'의 본질적 성격은 어떻고, 그것과 일반 도매상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유통학'에서 대리점이란 타인의 위탁으로 매매를 하는 도매상의 일종이다. 여기서 키워드(key word)는 물론 '위탁'이다.

도매상은 자기 이름으로 매매거래를 하지만, 대리점은 위탁자의 명의로 한다. 이점이 도매상과 대리점의 본질적인 차이다.

때문에 거래 가격과 거래 방법 및 거래 조건 등에서 대리점은 위탁자의 엄중한 지정을 받게 돼 있다. 따라서 대리점은 도매상보다 그 권한이 훨씬 적고 위탁자에 대한 종속성이 강하다. 대리점은 매매수수료를 받을 뿐이고, 매매 결과로 생긴 손익은 모두 위탁자에게 귀속된다.

이처럼 대리점과 일반 도매상은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이러한 연유로 초창기부터 오랜 세월 여태까지 보건의료 및 의약업계에서 약사법상의 의약품도매상을 그 어느 누구도 '제약사의 대리점'이라 생각하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그러한데, '대리점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대리점법)'은 제2조제3호의 '(용어의)정의'를 통해 '대리점'을, '공급업자로부터 상품 또는 용역을 공급받아 불특정 다수의 소매업자 또는 소비자에게 재판매 또는 위탁판매를 하는 사업자'라고 정의하면서, 도매상의 주된 업무인 '재판매'라는 단어를 끼워 넣어 위탁판매상 이외의 일반 도매상까지도, '대리점'으로 취급하도록 하고 있다.

이 법률을 근거로 구랍 27일, 실제 손에 잡히는 공식적인 대리점 표준계약서가 제정·공포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의약품 도매유통사는 꼼짝없이 제약사의 '대리점'이 됐다.

도매유통업계는 이 표준계약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정부가 칼을 빼 들었는데 이를 준수하지 않고 배겨날 수 있겠는가.

또한 비록 이 표준계약서의 준수 범위가 대리점법 제3조제1항에 의해, 제약사의 경우 중소기업기본법시행령 [별표1]에 따른 '중소기업자(연매출 800억 원 이하)가 아닌 자'와, 도매유통사의 경우 중소기업자(연매출액 800억 원 이하)로 한정돼 있지만, 이 범위 밖의 대형 도매유통사들도 결국 이 표준계약서에 서명(sign)이나 기명날인을 하는 도리밖에 뾰족한 방법은 없을 것 같다.

공정위와 보건복지부가 합동해 공권력으로 이 표준계약서 준수 여부를 확인·감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표준계약서가 곧 의약업계에서 일반화될 테니까 말이다.

도매유통사의 '제약사 대리점'화는 유통업계의 금과옥조인 '우리는 고귀한 의약품 공급의 주관자로서~'로 시작되는 '의약품유통업 윤리강령'에도 배치된다.

이 표준계약서를 보면, 제약사가 의약품 공급자가 되고 도매유통사가 대리점이 됨으로써, 도매유통사는 '의약품 공급의 주관자' 자리를 제약사에게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표준계약서는, 공정위가 일방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도매유통업계와 제약업계는 물론 보건복지부 등의 견해를 면담 및 연석회의 등을 통해 충분히 참작하여 제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공정위는 업계 일선에 설문조사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때문에 이 표준계약서에는 의약품 도매유통업계의 의견이 전적으로 녹아들어가 있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따라서 이제 의약업계 등이 도매유통사를 '제약사의 대리점'이라 불러도 얼굴 붉힐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자업자득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의약품 도매유통업계가 제약업계와의 거래 관계에서 몇 가지를 얻은 대가로 유통업계의 본질적 성격을 훼손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고 심히 우려된다. 늦었지만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이 전적으로 쓸데없는 걱정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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