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호 한국비엠아이 부사장

여름휴가길에 지겨운 비행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본 '증인'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자폐가 있는 소녀는 할아버지 살인사건의 피고 변론을 맡게 된 변호사에게 이렇게 묻고 말한다. "지우(같은 반 아이)는 늘 웃는 얼굴인데 나를 이용하고 엄마는 늘 화난 얼굴인데 날 사랑해요. 아저씨는 대체로 웃는 얼굴이에요. 아저씨도 나를 이용할 겁니까?"

이 영화는 진영과 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허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나쁜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누구나 한두번쯤 겪었을 법한 경험들이다.  잔인한 대사는 하나가 더 추가된다. "때가 묻어야 성공할 수 있어."

"임상의 성공은 사이언스가 아니라 디자인이다." 작년 알고 지내는 컨설팅회사의 시장조사에 같이 참여했다가 한 대학병원의 의사로부터 들은 말이다(이후 나는 이 말을 자주 써먹는다).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자면 임상시험은 특히 허가용 임상시험은 과학의 영역이라기보다 임상공학의 영역, 즉 임상기술자들의 단계에 들어갔다는 생각이다. 사실 약효에서 p값이 0.049와 0.051차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동일한 성분을 프로토콜A로는 가설을 충족시켰는데  프로토콜B로는 실패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실패한 임상결과를 두고 디자인을 다르게 했더라면 성공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순진하고 아마추어적이다. 해답보고 문제푸는 것은 녹화방송의 해설을 조리있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선 역사의 가정법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고 심지어는 추해보이기까지 한다.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뜻이다. 성공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면 새로 시작해서 성공한 데이타를 보여주면 된다.

내 롤모델이었지만 결국은 근처에도 못간 레전드가 있다. 연구부터 개발, Q, 약가는 물론 영업, 마케팅까지 제약업 자체에 달통한 분이다. 그분의 의미심장한 코멘트를 전한다. "신약개발은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나 그게 아닌데 안된다는 것은 멘탈의 문제야. 준비가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하기 때문이야. 도상훈련을 치밀하고 철저히 해야 하는데 말이야. 그리고 시스템이 있어야 해. 시스템의 근간은 연구노트에서 시작돼. 연구노트가 없는 개발품목은 믿을 수가 없어."

나는 연구노트의 중요성과 철저한 준비의 실천과정을 오픈 디스커션으로 해석했다. 제약은 특히 바이오는 원맨쇼가 불가능한 분야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말도 안된다고 여겼지만 몇년에 걸쳐 40여차례의 회의를 거친 끝에 세상에 나온 제품을 나는 기억한다. 솔루션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데이타를 오픈 안하는 자, 그가 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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